기사제목 역사 속에서 사라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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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사라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기사입력 2016.11.2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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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사람과 민족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해방 후  한반도 최초 반공 학생의거 역사적 의의에도 역사교과서에 수록 전무

신의주에서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친 반소(反蘇)·반김일성(反金日成)시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반공' ‘반소‘ 학생 의거였던 당시 사건에서 학생 23명이 총살되고 700여명이 부상했다. 체포자는 1천여명에 달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 아직도 생사가 묘연하다. 

11월 23일은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횡포에 항거한 최초의 반공 학생운동인 '신의주학생의거'가 일어난 지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5년 11월 18일 소련군이 주둔한 평안북도 신의주 서쪽에 있는 용암포에서 공산당 주도의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광복 직후 전국 각지에 조직된 민중자치기구)
이 대회에서 축하 연설을 하게 되어 있던 학생대표는 연설 도중 공산당의 여러 가지 비행(非行)과 소련군정의 압제와 소련군의 행패를 폭로·규탄하는 한편, 폐교 조치된 수산기술학교(공산당의 정치훈련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대장 이종흡의 만행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하고 나선 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며 ‘학원의 자유’‘공산당 타도’를 외치는 등 공산당 환영대회가 순식간에 소련군과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공산당 대회로 변했다.

당황한 소련군과 공산당은 경금속 공장의 노동자들을 사주해서 학생들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평안교회의 홍모 장로가 살해 당했고 12명의 학생 및 시민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 소식은 신의주시 평안북도 학생자치대 본부에 전해졌고, 신의주 학생자치대 본부 학생들은 공산당 당국과 소련군 현지 사령관에게 사건의 온건한 사후처리를 요구하다가 거절되자, 반소·반공을 위한 일대시위(一大示威)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 하였다. 
신의주학생의거 주동자들.JPG
 

소련 전투기, 학생들 향해 기총 사격 가해

11월 23일 신의주시의 6개 남녀 학생들은 상오 9시 학교 강당에 집합하여 ‘공산당타도’를 결의한 뒤, 3개 조로 나뉘어, 제1조인 신의주동중학교와 제일공립공업학교 학생들은 평안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를, 제2조인 사범학교와 제2공립공업학교 학생들은 평안북도공산당 본부를, 제3조인 평안중학교와 신의주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은 신의주보안서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하오 2시 정각을 기하여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23일 2시 신의주 동중학교·사범학교·공업학교 등 6개 학교 3,500여 명의 중학생들이 모여 호소문을 낭독하고 “공산당은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하여 약탈·강권발동·불법·기만 등 갖은 학정(虐政)을 자행하고 있고, 보안대는 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있다. 또한 공산당은 적색제국주의의 침투를 위하여 민족문화를 말살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이에 우리 학생들은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궐기한다” 고 외쳤다.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소련에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소·반공 의거로,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학원 자유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 행진에 나섰다.

이에 놀란 보안대와  소련군은 무장한 군인들을 앞세워 기관총과 따발총을 난사했으며 심지어는 전차와 비행기 까지 동원 기총 사격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70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속을 당했다.

또한 학생들의 궐기를 조종하거나 교사(敎唆)하였다는 죄목으로 민족진영의 간부 및 종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 구금 하였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이처럼 신의주 학생의거는 해방후 처음으로 일어난 반공 학생 의거로 북한주민의 반공의식(反共意識)을 대변한 것이며,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소련군정 하에 놓여 있던 북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학생 반소 반공 운동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신의주 반공학생의날 기념우표 (2).JPG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된 후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김일성의 공산 학정에 항거하는 공산당 타도와 반소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수십 년이 지나도 신의주 학생의거 참여자들을 색출해 숙청할 정도였다.

이처럼 소련과 김일성의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고 대거 남하한 청년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의의 모체는 신의주 의거의 학생들 이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의날 기념우표 (1).JPG
 

신의주 학생의거는 4.19의거나 소위 민주화운동 등에 비해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은데 지금까지 홀대하는 역대 정부의 인식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40여 년간 단 한 차례도 추모대회를 개최한 바 없고 심지어 신의주 의거에서 해주학생운동까지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당시 희생자 숫자를 23명 혹은 24명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도 문제 이지만 시위이후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학생이 과연 몇 명인지 정확한 숫자도 없으며 이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실태파악이 전무한 상태이다.

신의주 학생의거는 1956년 11월 23일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되고, 1968년~1969년에는 반공 학생의 날 기념우표가 발행 되었고, 이후 1973년에  각종 기념일이 통폐합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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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안타깝다
    • 이런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공산화를 막았는데 지금의세태를 보면 정말 가습이 아프다.젊은 사람들 세상을 독바로보고 냉정한 판단을 할줄 아는 노력이 급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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