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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문윤국 선생을 아십니까?

평안북도의 독립운동 이끈 진정한 민족대표 배후 애국지사, 수십억원 독립지원금 상해 임정 지원
기사입력 2016.08.0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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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문윤국 선생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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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문윤국 선생은 1877년 1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문정흘 선생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의 한문교사 및 정주읍 신안소학교 교사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10년에 기독교에 입교, 1913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에 37세의 나이로 입학, 만학의 의지를 불살랐다. 

문윤국 선생은 덕성, 덕흥, 연봉 등 3개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1919년 음력 1월 선천 남교회에서 개최된 경북노회에 참가, 조선독립운동 발기인으로 서명하였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독립청원서에 전국 13도 대표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대표로 동참하려 하였으나 기독교계 전체의 대표 이승훈장로가 선생의 두손을 꼭 잡고 눈물로써 거사 실패 후의 후사를 당부해, 선생이 목사로 담임하고 있었던 덕흥교회 이명룡, 김병조 두 분의 장로가 서명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동년 3월 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아이포면 사무소 뒷산에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이승훈장로와 선생이 협력하여 세운 오산학교를 중심하고 만세운동을 앞장서 결행하다 일경의 창검에 3곳이나 찔리셨으나 죽기를 굴하지 않았다. 선생은 4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일제는 군수자리를 주겠으니 협조하라고 회유까지 하였으나, 선생은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을 할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며 훈교 하신 끝에 2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 특사로 반감되어 출감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계속돼 1921년부터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김숙제 목사를 통해 독립군자금 7만 8천원(당시 쌀 한가마가 7원으로 상정할 때 현재시가는 약 17억)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당시 문윤국 선생이 금광을 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가져갔기에 ‘목사가 패가망신해 고향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니까 도망가 버렸다’고 소문이 났었다. 나중에 유서를 통해 집안의 재산이 상해 임시정부의 김숙제 목사를 통해 전달되었음이 밝혀졌다. 

선생은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불가불 충북 괴산으로 거처를 옮겨 3년을 지낸 후 계속되는 감시로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해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그 후 1945년 8.15 해방으로 환고향했으나 공산화되자 강원도 정선으로 다시 남하하였다. 

1948년 이승만 박사로부터 정선군수를 통해 세 차례나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후학들을 가르치는데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958년 1월 2일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노루목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별세하였다. 

현 통일교의 창시자인 문선명 목사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를 위해 살다 가신 문윤국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영원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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