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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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

기사입력 2016.06.2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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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카고(Christmas C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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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
1950년, 흥남 부두에서 세계 전쟁사상 가장 극적인 대사건이 펼쳐진다.
10만5천 명의 미군, 12만 명의 중공군, 9만1천 명의 피난민이 벌이는 생과 사의 극적인 드라마! 인종과 국적을 초월한 위대한 인류애의 대서사시, 그 전율스러운 감동이 마침내 우리 곁으로 온다!
누구에게나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상징으로 각인돼 있는 이 작전을 말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도 우리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유행가로 남은 흥남항의 이별은 노래보다 더 슬픈 통한의 현장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53년 7월 27일까지 1128일간 치러진 한국전쟁이 남긴 것은 인명 손실 50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 생산시설 80%의 파괴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참전했던 외국군 희생자들은 미군 137,250명과 영국군 4,908명 외 모두 16개국에서 파병된 총 154,881명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희생자들과 전대 미문의 아픔을 가지고 온 한국전쟁이 6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역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이 기사는 ‘흥남철수작전’을 통하여 전쟁의 아픔을 되짚어보고, 그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호국선열들의 휴머니즘과 희생, 그리고 그 치열했던 노력을 되짚어 보고, 결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 게재한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기습 도발로 시작된 한국전쟁!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는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으로 역전되어, 1950년 겨울 국군과 UN연합군의 대반격으로 북진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이에 한국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 장군은 “종전을 위한 총공세 (END OF THE WAR OFFENSIVE)”을 선포하고 당시 미 10군단 사령관 애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무조건적인 북진을 명령하지만. 예상치 못한 40만 중공군들의 출현으로 미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미 해병1사단과 미 육군7사단은 중공군에 쫓겨 장진호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장진호는 영하 30~40까지 내려가는 남한에서 가장 추운 한랭지역으로 병사들은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음의 계곡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으며, 그 사상자가 수천여 명에 이르렀다.
20160620_104628.jpg▲ 장진호 전투에서 추위로 고전하고 있는 미 해병부대원


미 해병대 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된 이 전투를 戰爭史家들은 ‘장진 (Chosin(ちょうしん))호 전투’ 또는 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어서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흥남부두로 철수하여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1950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군 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미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한 이 전투와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20160620_105322.jpg▲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 사령관
 
 
당시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두 부대에게 긴급히 철수 명령을 내리고 고립된 병사들의 구출작전과 동시에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함흥에서의 철수 명령을 받는다.
알몬드 소장은 원산에 게릴라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육로로 철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미군과 한국군을 흥남으로 집결시켜 배로 철수 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한편,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지역 주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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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 미군과 한국군을 환영했던 사람들, 이제 그들은 공산당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피난을 가기 위해 하나 둘 흥남항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드디어 선상 철수가 시작되고 미군 병사들이 죽음의 땅을 벗어나고 있는동안 민간인들은 영하 30도의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 그들의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20160620_145006.jpg▲ 현봉학 당시 민사고문담당관 (사진 아랫쪽 가운데)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당시 미 10군단 사령부 민사고문담당관이었던 한국인 현봉학은 알몬드 소장을 찾아가서 민간인을 배에 태워달라고 거듭 간청한다.
그러나 당시 알몬드 소장도 역시 다급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철수명령이었고 그는 우선 10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현봉학의 간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암담한 상황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평소 현봉학에게 민간인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전해 들은 알몬드 소장의 작전참모였던 에드워드 포니대령은 현봉학과 함께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수륙양용작전의 전문가였던 포니 대령은 누구보다도 배를 잘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장비 수송선인 LST의 여유공간을 생각해냈다.
장비를 싣는다 해도 그 여유공간에 민간인 수천 명은 족히 탈 수 있다고 생각해 낸 것이다.
 
20160620_110306.jpg▲ 에드워드 포니 대령

 
상부의 명령 때문에 민간인 철수를 거절할 수 밖에 없어 안타까워 하던 알몬드 소장은 국군 제1군단 김백일 장군이 “피난민이 우선이다. 우리는 여기서 싸우다 죽겠다”고 결의를 보이자, 크게 감격하며 12월 14일 마침내 100만 톤 가량의 유류와 많은 무기들을 포기하고 대신 민간인을 배에 태우기로 결정한다.
 
20160620_105255.jpg▲ 레너드 라루 '메러더스 빅토리' 선장

 
한편 도시는 화염에 휩싸여 있고, 다가오는 대포 사격과 공습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탈출이 매시간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용 제트 연료를 가득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이 배의 상급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씨는 “선장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라고 증언한다.
“3일 동안 신이 우리와 함께 항해했다고 믿는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1960년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크리스마스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 놀랍고 경의로운 항해를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그 항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여기며,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날 아침의 배는 여섯 시 십오 분에 닿았다.
눈바람을 무릅쓰고 얼음판 위에서 밤을 새운 군중들은 배가 부두에 와 닿는 것을 보자 갑자기 이성을 잃은 것처럼 와~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곤두박질을 하듯 부두 위로 쏟아져 나갔다.
물론 대부분의 군인가족 관계와 기독교 관계에 등록 된 사람들이었으나 간혹 일반 등록자와 무 등록자도 섞여있었다. 부두 위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공포가 발사되고 호각이 깨어지고 동아줄이 쳐지고 해. 일단 혼란이 멎었으나 그와 동시, 이번에는 또 그 속에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 쌀자루를 떨어뜨린 남편, 옷 보퉁이가 바뀐 딸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서로 부르고, 찾고, 꾸짖는 소리로 부두가 떠내려 가려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이 배를 타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배 중 하나인 일반 화물만을 선적하도록 건조된 화물선인 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을 포함한 47명 선원들은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를 용기, 지략, 투철한 승무원정신,그리고 인도주의적 사랑으로 완수해 냈다. 그 배에는 물도, 먹을 양식도, 의료진이나 통역관도 없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북한 공산정권을 탈출하여 거제도에 도착하기까지, 항해도중 5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승선한 피난민들 중 단한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기적적인 피난민 구출 작전이었다.
 
20160620_135127.jpg▲ 국군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
 
 
현봉학과 포니 대령의 감동적인 노력, 김백일 장군의 결의, 그리고 알몬드 소장의 과감한 결단에 의해서 구출된 민간인 수는 자그만치 10만 여명, 민간인을 태운 마지막 배가 흥남부두를 빠져 나오자 마침내 12월 24일 흥남 부두가 폭발된다.
1950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들에게 생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생명”과 “자유”를 동시에 안겨준 것이다. 이처럼 “홍남 철수”는 어느 전쟁에서도 찾기 힘든 대규모 철수작전임과 동시에 가장 명예로운 철수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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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피난민을 구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영웅적인 승무원들은 1958년과 1960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정부로부터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흥남 부두 이야기는 유엔군의 철수가 한창일 때 포위하고 있는 공산군에 의해 생명을 위협 받고 있는 북한 피난민 14,000명을 마지막으로 구출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인도주의적인 희생과 행동을 보여준다.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이들은 이를 “Christmas cargo" 라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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