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6.25 한국전쟁 참상의 사진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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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참상의 사진기록

전쟁의 상처
기사입력 2017.07.0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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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jpg▲ 우리나라 국군의 포사격 모습
 
6.25전쟁은 일본의 패망에 따라, 미.소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 비롯된 전쟁으로 미소냉전의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와 모택동의 지원 하에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38선을 돌파 남침한 것을, 한국과 참전국이 함께 개전 초기에 북의 공격을 막아내어, 우리가 공산화되는 문턱에서 북의 의도를 좌절시킨 전쟁이었다.

비가 내리던 1950년 6월 25일 남침기습에 성공한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당초의 계획대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북한군은 6 25전쟁 발발 당시 소련제 전차 등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했고, 중국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이 축적된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의 군사력은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노후화된 경장비 위주로 무장돼, 전차나 대전차 화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공비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훈련도 실시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2.2.jpg▲ 전쟁은 철저하게 각군 보급소를 공격했다. 사진은 B-25의 5인치 로켓탄에 명중한 열차사고
 
초기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군은 기세가 높아져 더욱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전투력을 재정비한 국군과 미군은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에서 최후 방어선을 형성하고 부산 교두보를 확보했다.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던 치열한 공방전속에 유엔군과 한국군은 많은 희생을 치르며 낙동강 전선을 지켜냈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총반격 작전을 수행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 말 38선에 도달함으로써 97일만에 전쟁 이전의 상황을 회복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100여만 명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은 다시 피탈되고 탈환되는 과정을 겪었고, 6 25전쟁이 발발된지 1년이 경과된 1951년 6월에는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전 전선이 소강상태를 이루는 상황에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피해를 입은 곳은 공공단체시설 542개, 학교 33,015개, 사찰.교회 5,236개, 사회단체시설 171개, 병원 940개, 주택 524,000동 등이었으며 남 990,968명과 북 2,680,000명의 민간인 피해와 한국군 1,507,978명과 유엔군 81,426명 총 1,189,404명의 아군 피해와 북한군 132,000명 중공군 931,000명등 총 1,563,000명의 적군피해가 있었고 한국 1명 미국 10명을 포함해 총 18명의 종군기자가 순직했다.

자료제공 : 한국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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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jpg▲ 국군은 피난민들에게 식량이나 의약품 등을 주고 생활을 원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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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jpg▲ 한국전쟁중의 광화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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